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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서원의 원형을 찾아서… 한국서원학회 학술대회 / 정만조 (국사) 교수

[동아일보]
서원(書院)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엇갈린다.

조선 말 대원군이 당쟁의 근원지라면서 서원을 철폐한 것을 계기로 양반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권력기관이자 사색당파를 재생산하는 지역 거점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디 서원은 사림세력이 왕권에 맞서 민본정치를 요구할 수 있는 정치적 거점이었고, 향촌공동체의 도덕적 교화의 중심지였고, 선비들이 강학과 교류를 펼칠 수 있는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이런 서원의 역설적 면모는 23일 국민대에서 열린 ‘동아시아 서원 연구의 현황과 과제’ 국제학술대회의 여러 발표문에서도 확인됐다.

역사상 서원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 당 현종 때 세워진 ‘여정수서원(麗正修書院)’과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이다. 이들 기관은 일종의 관립도서관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서원과 근본부터 달랐다. 그러다 후대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학문 연마의 공간에 서원이란 명칭을 쓰면서 사립교육기관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서원은 유가의 공간이었지만 불가의 영향을 받아 명산대처에 세워졌고 조직과 강학 형식도 선종의 그것을 모방했다. 서원에서 덕성과 명망이 높은 선비를 초빙해 산장(山丈) 또는 방장(方丈)으로 부른 것도 불가의 영향이다.

송대와 명대에 있어 국가의 견제를 받았던 서원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했지만 반대로 국가의 육성정책 아래 관학(官學)화했던 원대와 청대의 서원은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 중국에 4000여 개의 서원이 있었지만 국가유적지로 지정된 곳이 3곳에 불과한 이유도 청대에 관학화한 서원들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모두 신식 학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권(대원군)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강제 철폐됐던 한국의 경우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필암서원 옥산서원 등 40여 곳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날 창립된 한국서원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정만조 국민대 교수는 “서원은 과거시험공부 중심의 관학에 맞서 순수 학문 연마와 인격 도야에 충실한 독립적 공간일 때 가장 빛났다”며 “현대에도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공간으로 서원을 재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출처 : [동아일보 2006-11-29 0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