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국민인! 국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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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아버지는 한국에서… 아들은 이탈리아에서… 父子 자동차 디자이너의 車… 車… 車 / 박종서 (퓨전디자인학과) 교수


'포니정(PONY 鄭)'에서 만난 박종서 국민대학교 교수가 손수 만든 조형물에 새겨진 HCD-1을 가리키고 있다. 작품명 '알 미오 카포(AL mio capo)'는 아들 박찬휘씨가 붙인 것이다.


아버지 박종서씨 25년간 현대차의 모든 모델에 관여

아들 박찬휘씨 피닌파리나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

찬휘씨 "아버지 가장 존경… 아버지 후광 없는 곳에서 도전하고 싶었다"

1984년 여름 밤 울산 현대자동차 디자인 사무소 근처의 집에서 한 남자가 자동차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문득 등 뒤의 문이 열렸다. 꼬마가 달려와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 다섯 살 배기는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바퀴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생각했다. "내 아들이 나보다 더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지 않을까?"

24년이 흘러 그 추측은 절반쯤 맞았다. 아버지 품에서 같이 스케치하던 아들 박찬휘(31)씨는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회사 '피닌파리나(Pininfarina)'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가 됐다. 피닌파리나는 스포츠카 페라리 디자인을 비롯해 각종 컨셉트 디자인으로 세계 자동차 디자인을 이끄는 회사다. 박씨는 22명뿐인 이 회사 디자이너다. 입사하자마자 프로젝트에 투입돼,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컨셉트 카 '신테시(Sintesi)'의 내부 디자인에 참여했다.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 박종서(61·국민대 산업다자인과 교수)씨는 한국 자동차 디자인사(史)의 신화(神話)가 됐다. 박씨의 손에서 1990년대 현대차의 상징이던 울퉁불퉁한 근육질 차체(車體)와 쏘나타3의 땅콩 모양 헤드램프가 나왔다. 1979년 현대차에 디자이너로 입사해 2004년 디자인연구소장 겸 부사장으로 퇴사할 때까지 25년간 현대차에서 나온 모든 차에는 그의 손길이 묻어 있다.

서울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본사 1층에는 고(故) 정세영 회장을 기념하는 '포니 정(PONY 鄭) 홀'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포니 정 홀' 앞 벽에는 그가 만든 세로 3m×가로15m짜리 커다란 동판 부조 작품이 붙어 있다. 부조에는 실물 사이즈의 포니부터 아반떼, 티뷰론, 산타페와 컨셉트카 HCD-1처럼 현대자동차사(史)에 기념할 만한 모델들이 늘어서 있다.

박 전 소장은 선명한 빨간색 셔츠를 입고 공책 한 권과 2B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의 요즘 본업이지만 그는 여전히 현직 디자이너고 예술가다. 손에 든 공책에는 이런저런 스케치가 가득했다.

박 전 소장은 최근 금속 공예를 시작했다. 그는 "순수 창작에서 시작해 디자인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데 나는 거꾸로 왔다"고 말했다. 현대차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그는 "망치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남아있을 때 디자인을 떠나 순수 공예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애초에 아들이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아들이 미대 진학을 결정했을 때 아버지가 추천한 것은 '금속공예'였다. 더 어렸을 때는 음악가가 되길 바랐다. 아버지는 이런 마음을 담아 주말마다 아들을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아들의 기억 속에는 울산 인근의 자연이 생생히 남아있다. 아들은 백사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은 모래성을 기억하고, 개울가에서 만든 물레방아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하길 바랐다"며 "디자인은 사람을 즐겁게는 해도 눈물을 흘리게는 못 하는 것이기에 권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디자이너가 된 아들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니 결국 아이를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운명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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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처럼, 아들도 원래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홍익대학교에서 금속 공예를 전공한 찬휘씨는 제품 디자인, 조명 디자인 등 다양한 공모전에 나섰지만 자동차 공모전에는 나서지 않았다.

아들의 생각이 바뀐 것은 2004년이다. 아버지가 현대차를 퇴직하겠다고 말하자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선수'에서 '지도자'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고 말했다.

자동차로 방향을 정한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좇았다. 찬휘씨는 2005년 7월 영국 런던의 RCA(Royal College of Art·왕립 미술 대학원) 자동차 과정에 입학했다. 25년 전 박 전 소장은 한국인 최초로 RCA 자동차 과정에 입학했다.

지난해 5월 두 사람은 한 교실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RCA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학생이 됐다. 아들은 "새삼스레 다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해 가을 아들은 피닌파리나의 디자이너가 됐고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28년 전 아버지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진만 찍은 곳에서 아들이 일하게 됐다. 아들은 "아버지의 후광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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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아버지와 이탈리아에 있는 아들은 일주일에 3~4번씩 통화를 한다. 주변에선 친구처럼 친하다고 말하는 부자지간으로 보이지만 디자인 얘기를 할 때는 다르다. 아들은 "아버지의 디자인은 한물갔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너는 아직 현실을 모른다"고도 응수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디자이너로서 존중한다.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巨匠)'인 아버지는 아들을 이렇게 평했다. "아들은 단번에 입체를 떠올리고 다듬어 나가요. 사물을 평면으로 보고 그걸 조합해서 디자인하는 나는 할 수 없는 재주죠. 사물을 머릿속에서 깎아나가는 아들은 보면 '과연 세대 차가 있구나'라고 실감합니다."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거' 격인 유럽 자동차 디자이너가 된 아들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는 아예 여기에 오지도 못했겠죠. 바로 얼마 전까지도 유럽인들은 한국 차를 보고 '한국에서 만든 것치고는 괜찮네'라고 얘기했어요. 같은 급으로 보지 않은 거죠. 이제는 냉정하게 평가해요. 아버지와 같은 선배 디자이너들이 한국 차를 이 수준까지 올려놓은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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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들이 유럽에 머물기를 바란다. 박 전 소장은 지난겨울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토리노 인근 저택을 지날 때 그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철문의 사진을 찍자 아들은 "사진을 찍으면 베끼게 되지 않느냐"고 따졌다. 박 전 소장은 "한국에 있는 디자이너라면 누구라도 자료 삼아 모으려고 했을 것"이라며 "이런 사고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럽에 더 머물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들은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찬휘씨는 "유럽에서 유럽의 디자인을 배우지만 여기에 뿌리를 내리면 한국인 얼굴의 외국인 디자이너가 될 뿐"이라며 "한국에 돌아가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일하겠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유럽에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바람을 말했더니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버지가 현역 디자이너로 더 머물러야겠네요. 저는 아버지와 현장에서 같이 일하고 싶으니까요."


현대자동차 전 디자인연구소장이었던 박종서 국민대 교수. 박교수의 아들 찬휘씨도 이태리 스포츠카 디자이너. 그가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의 개념을 들어봅니다.




출처 : 조선일보 기사입력 2008-06-14 19:09 |최종수정2008-06-14 19:26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1968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