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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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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 Magazine] Forever - 김추자, 한국 현대사를 소환하는 혹은 복원하는 힘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의 여인” “전설의 디바” “터질 듯한 열정의 가수” “섹시 디바의 원조” “육감적인 도발성”
이 수식어들은 다름 아닌 김추자를 형용해온 찬사들이다. 모두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적절한 표현처럼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들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2000년 전후로 시작해서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긴 그녀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전혀 철 지난 옛날 노래 같지 않고 변함없는 울림을 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여전히 김추자를 잊지 못하는 까닭이. 시절은 벌써 반세기 가까이 지났건만 그녀가 남긴 자취는 시간이 무색하게 퇴색하기는커녕 점점 더 짙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한참 잊혀지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건만 그녀에 대한 평가가 줄을 잇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한국의 대중가요사에서 가수에 대한 평가는 대개 당대적인 것이지 사후적인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지 않은가. 지금은 유명을 달리해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이성욱 씨는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며, 김추자에 대한 그의 열렬한 팬의식을 토로했다. 다소 생뚱맞게 보일 정도로 뒤늦게 그녀에 대한 고백을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그와는 동년배인 필자 역시 같은 심정이고, 그것은 마치 짝사랑해온 사람에 대한 뒤늦은 고백과 닮아 있다. 그렇다. 그것은 고백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대한 마음의 빚일까? 아니면 온당하지 못한 평가를 받아온 것에 대한 죄의식의 발로였을까? 그도 아니면, 다시 이성욱 식의 고백을 빌자면, ‘나를 카운 요람’에 대한 뒤늦은 자기긍정인 것인가.

노래방에서도 김추자는 어떤 가수보다 빈번하게 소환된다. 7080 트렌드에서도 그녀는 가히 트렌드세터라 할 만하다. 나아가 사람들은 김추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강력하게 소환하고 싶어 한다. 단지 좋았던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김추자의 공식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그녀의 복귀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팬들의 성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설령 그녀가 복귀한들 옛 모습의 그녀는 결코 아닐 것임을 알고 있을 터인데도, 다음이나 네이버에는 세대를 달리해 팬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복귀를 바라는 그들의 호소에는 그녀의 노래와 함께 한 삶의 기억이 어떤 가수보다도 강하게 베어 있다. 70년대 전반으로부터 무려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일고 있는 이 현상은 무엇인가. 김추자에게는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김추자는 70년대의 아이콘이다. 여기서 70년대라는 말을 과거의 한 때라고 생각하지 말자. 강준만은 70년대가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70년대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개발과 반공이라는 망령을 창안한 것도 그때요, 독재와 부조리한 권력, 부패, 비민주성의 정치적 유산을 본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던 때도 그때요, 아파트, 고속도로, TV, 도시화 등 현대적인 삶의 양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때도 70년대였으니 말이다. 70년대라는 말은 한국 현대사를 지칭하는 그런 대표성을 띠고 있다. 그러니까 김추자를 따라다니는 ‘70년대’는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한정적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지금 우리의 삶을 주조해낸 가장 큰 근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김추자 역시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지금 저 옛날의 김추자를 불러내고자 하는 열망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김추자에게 쏟아진 찬사에 비해 그녀의 한창 때는 지나치게 짧았다. 그녀는 69년에 신중현의 <늦기 전에>로 데뷔, 71년 <님은 먼곳에>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의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세간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김추자를 통해 한국적 록을 시험하고자 했던 신중현의 작곡도 워낙 출중하기도 했지만, 김추자는 창법, 무대 장악력, 패션 등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떨며 슬픔을 지어내는 시늉 같은 걸 아예 하질 않는다. 여자 가수라면 으레 하는 관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예쁘게 꾸미기 위해 목에서 내는 소리가 아닌 저 깊은 뱃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시원스럽게 쏟아낸다. 고음과 저음을 가릴 것 없이 거침없는 넘나드는 그녀의 창법은 노래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뿐인가. 그녀는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최초의 비주얼 가수이기도 했다. 힙의 윤곽이 들어날 정도로 몸에 꽉 끼다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퍼지는 일명 나팔바지(판탈롱)나 골반바지를 입고 흔들어대는 그녀의 율동은 시각적 충격 그리고 몸 감각의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의 춤 은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전혀 부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니라, 몸이 노래에 저절로 호응하는 춤사위로,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노래에 힘과 리듬을 싣기 위한 역동적인 몸짓이었다. 노래와 율동이 한덩어리였던 것이다. 노래가 호소력을 발휘하는 딱 그만큼 춤도 그만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골목에서 혹은 소풍 가서 그녀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일 수 있었던 것도 한 덩어리로서의 노래와 춤이 몸의 자연언어처럼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노래와 춤을 보고 들을 때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흥은 펄떡펄떡 살아 있어, 듣는 이 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죽했으면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당시 애연가들 사이에서 차지했던 청자의 위상에 견줄 만한 그런 담배가 현재는 없으니 지금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실감할 수가 없다. 김추자는 노래와 춤의 아이콘이었다. 김추자는 잠자는 돌부처도 깨울 만큼 감각을 일깨우고, 정신을 흔들어놓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창법은 회백색 신피질의 대뇌를 뚫고 저 깊숙한 속 어딘가에 꽂힌다. 그의 노래는 그래서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보다는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호소력이 강했다. 노래가 갖는 힘을 이렇게 강렬하게 본능적으로 느끼게 한 경우가 있을까?

 
 
 

김추자에 대한 재평가에서 나오는 화려한 수사학처럼 김추자가 항상 그런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추자의 이미지는 신중현, 이장희, 윤형주 등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걸출한 인재들을 단죄했던 독재정권의 마수걸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정희정권의 용어로 번안해보자면 그건 퇴폐와 불온이었다. 정치, 사회, 노동 등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들을 단죄하는 기준은 지극히 자의적이지만, 정치권력의 화신이었던 그들의 행태는 더할 수 없이 졸렬하였고, 폭력의 강도는 무시무시했다. 하긴 김추자를 두고 창법 미숙이라는 코미디 같은 단죄가 덧붙여지기도 했으니 그들이 무얼 못했으랴. 그럼에도 김추자에게 덧씌어진 마수걸이는 강력하게 작용했다. 퇴폐와 선정 같은 것 말이다. 퇴폐와 선정, 대마초 가수라는 주홍글씨는 청년 대중문화 기수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무의식적 편견과 거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대마초가 주홍글씨로 둔갑한 것도 정치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사실 그 시절로 돌아가보면 대마초는 별다른 법적 제재 없이 담배 피우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던 일상적 문화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대마초는 퇴폐 및 정신병과 같은 말이 되었다. 75년 대마초 파동에서 신중현을 비롯한 다수의 연예인들을 정신병원에 수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마초를 앞세운 마녀사냥의 결과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한 획을 긋고 있던 청년 대중문화의 초토화 그 자체였다.

독재정권은 유신헌법과 새마을운동, 반공시책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일체의 문화를 퇴폐와 불온한 문화로 규정했다. 치마 길이와 머리카락의 길이마저 공권력으로 다스리려 했으니 이들의 눈에 청년 대중문화가 어떻게 비췄을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폭압성이 워낙 전면적이고 강도가 세 미처 그 폭압을 제대로 인식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후 그들은 어떤 공적 공간에도 출현하지 못하고 지하로, 고향으로, 미국으로 잠적하고 흩어졌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에는 70년대 그리고 뒤이은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이 이들에 대한 어떤 눈길도 허용할 수 없었다. 정치적 폭압에 맞선 민주화 투쟁에서도 이들의 희생은 부차적인 혹은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져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삶에서, 기억에서 지운 듯 잊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이들에게 덧씌어진 죄목들을 요즘의 말로 다시 해석하자면 파격, 해방, 솔직함,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김추자는 거침없는 목소리로, 파워풀한 율동, 과감한 패션으로 대중들에게 활력과 역동성, 거침없음, 솔직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생동하는 문화의 주체적 개화이자 민주적 발로였지만, 무시무시한 유신의 밤 속에 묻히고만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가수들조차 김추자와 같은 재조명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김추자의 본격적인 활약 시기가 불과 5년 정도였는데도 사람들이 김추자를 잊기는커녕 열렬하게 소환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남긴 족적은 매우 굵고 강렬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김추자가 무대에 섰던 70년대 초중반에 청(소)년기를 경유했던 7080세대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음악성을 뒤늦게 발견, 놀라워하는 30대에 이르기까지 김추자에 대한 고백과 재발견의 행렬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특히 김추자의 자장 안에서 함께 호흡했던 사람이라면 김추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김추자는 이미 그들에게 문화적 DNA로 각인되어 있어 부정한다고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호명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4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김추자를 소환하는 것은 기억을 복원하는 일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주체적으로 인정하는 일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뒤늦게 현재의 자신들이 있기까지의 삶을 반성적으로 대면하면서 김추자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님은 먼곳에>와 같은 영화의 형태로든 조관우의 리메이크로든 김추자에 대한 계속된 소환은 앞으로도 불가피해 보인다.

 
글 / 김수기(현실문화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