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코엔지(Koenji)를 알게 된 것은 7월 도쿄아트북페어에 참가하러 그 동네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두 번째 방문이었고, 같은 해 3월에도 간 적이 있었다. 첫 방문에선 코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아둔하게도 그건 마치 홍대 놀이터를 지나면서 그곳이 홍대인지를 잘 몰랐던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도쿄 진스터 개더링(Tokyo Zinester Gathering)’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운 좋게 우리가 머무는 시기에 열려 당장 주최측에 참여 의사를 전했더니 오라는 답신을 받았다. 행사는 진을 출판하는 릴맥(lilmag)과 독립서점 IRA(Irregular Rhythm Asylum)의 주최로 이뤄졌다. ‘도쿄 진스터 개더링’은 정말 동네의 조그만 행사였다. 아니 말 그대로 ‘개더링’이었다. 유일한 외부 참여자였던 우리의 등장으로 다들 놀란 눈치였다.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낯설음 덕에 서너 시간만 머물렀고 코엔지는 행사가 열린 동네 정도로 기억하며 몇몇 진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서울에 와서야 알았지만 행사가 열렸던 장소가 바로 “아마추어의 반란 12호”였다.
그러고 나서 민중의 집에서 <아마추어의 반란 Amateur’s Riot>이란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를 가졌고 문래동에서는 주인공인 ‘마쓰모토 하지메(Hajime Matsumoto)’와 이번 에 글을 써준 ‘제레미 할리(Jeremy Harley)’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찮게 코엔지를 경험해서인지 작년에 출간한 마쓰모토 하지메의 책 <가난뱅이의 역습>은 코엔지의 활동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텍스트처럼 읽혀졌다.
두 번째 7월의 방문은 “진스 메이트”라는 도쿄아트북페어에 참가하기 위해서였고, 그 기간동안 제레미와 마쓰모토 덕분에 코엔지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마쓰모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한테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제레미는 그 집이 안되면, 다른 집에서 자도 되고, 비록 목욕할 곳이 없지만 “아마추어의 반란 12호” 점에서 잘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마쓰모토의 다다미방에서 잘 수 있는 영광을 얻었고, 밤마다 코엔지 동네를 서성이며 가게 주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작품활동을 하고 글을 쓰며 직접 리폼한 옷을 파는 작가인 가게 주인이 있었고, 요일별로 다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카페이자 주점이기도 한 음식점도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요요(Yoyo)씨가 운영하는 날이라 저녁식사로 “베지 음식(Veggie Food)”을 먹었다.
코엔지는 한국의 홍대로 소개되기도 한다. 홍대처럼 특이한 가게와 개성 있는 옷차림의 사람들도 많고,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는 젊은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미디어버스도 상수동에 서점을 오픈했는데, 준비 과정에서 소상공 지원센터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창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수익성을 보장한 아이템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따지면, 서점은 유망 업종도 아니다. 그런데 코엔지의 점포들을 보면, 돈을 따지는 곳이라기보단 그들만의 놀이 공간처럼 보인다. 늦은 밤까지 열린 옷 가게에선 펑크족 차림의 두 젊은이가 창가에 앉아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코엔지가 젊은이만의 거리라고는 할 수 없다. 이들과 함께 동네 어르신들이 즐겨찾는 길거리 주점도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소품이나 액세서리, 옷 등을 파는 가게, 팬시한 카페뿐만 아니라 헌 옷 가게나 재활용 가구점 등 동네 주민들을 위한 곳들도 있다.
코엔지 공동체와 동네를 말하기엔, 우리의 경험은 매우 피상적이다. 고작 매체를 통한 정보, 며칠 동네에 머물면서 그들과 나눈 술잔과 짧은 대화를 통해 얻은 것들뿐이다.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 그 경험을 미뤄 짐작하게 해 동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과장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코엔지에 대한 이야기는 현지에 살며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훨씬 더 잘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이미 국내 일부 매체에 소개된 적이 있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다른 이들을 통해 고엔지 공동체와 각자의 활동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들 모두는 매우 느슨한 연대를 통해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과 지역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원고를 써 준 제레미 할리는 도쿄에서 7년 정도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이다. 외국인이 동양권의 언어를 능통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제레미는 코엔지에서 살면서 ‘아마추어의 반란’ 활동의 초기부터 크고 작은 사건들의 목격자였으며, 현재는 그 일원으로 살고 있다. 그가 보내준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코엔지에 대한 자전적인 경험과 공동체를 다루며, 아마추어의 반란 12호점을 운영하는 오쿠라씨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코엔지에 위치한 “아마추어의 반란” 가게들에 관해 소개한다. 제레미의 글과 오쿠라의 말을 통해 코엔지의 공동체 문화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우리와 비슷한 조건 안에서 코엔지 젊은이들이 어떻게 다른 공동체, 다른 삶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글 / 구정연 (미디어버스 에디터)
나는 뉴욕시 브루클린 태생이지만 일본에서 7년째 거주 중인데, 그 중 4년 반은 일종의 마을과 같은 사회적 기능을 하는 한 공동체에 몸을 담았다. 그곳은 대도시 도쿄 내 코엔지라는 동네 구석에 위치해 있으며,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다수의 상점들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마쓰모토 하지메의 책 <가난뱅이의 역습>을 보면 이곳의 초기 역사가 어느 정도 소개되어 있다. 나는 노래를 쓰고 영화를 만들며, 단편 영화제를 운영한다. 생계를 위해서는 영어와 일본어 2개 국어 사용 능력을 바탕으로 번역 등의 프리랜서 일을 한다. 나는 여기에 미국인 친구가 하나도 없고 일본어로 일상생활을 한다. 도쿄에 살면서 이따금씩 브루클린을 방문하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둘 중 한 곳이 다른 곳보다 더 편안하거나 친숙하다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한 인식이 꽤 강한 편이다.
미국 땅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수많은 미국인들은 사실 자신의 국적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뉴욕시와 같은 곳?예컨대, 뉴욕은 거주자의 40% 이상이 이민자이다?에서 태어난 나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 생각하라는 사회적 권고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실은 어느 다른 곳보다도 미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으로, 나는 그것이 우리가 미국의 폭력과 미국에 대한 증오에서 거리를 두는 한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세계의 대부분이 그러한 폭력과 증오에 대해 친숙하지만, 우리 자신은 미국의 그러한 측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에겐 그것이 마치 다른 나라 얘기처럼 생소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미국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음, 우린 사실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뉴요커지.”라고 실제로 믿어버림으로써 미국이 자행하는 폭력과 미국에 대한 증오의 책임을 어느 정도 회피하려 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정체성의 문제(A Question of Identity)”라는 에세이에서, 파리에 거주하기 전까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스무 살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해외 생활을 하는 중에 그 에세이를 우연히 접했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내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부분, 즉 실은 내가 미국인이라서 갖고 있는 부분들을 발견하면서 받았던 최초의 충격이 가라앉고 나자, 이어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그래도 내가 다른 곳이 아닌 미국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나라를 방문하거나 접해 보았다. 어릴 때는 내 조상의 1/4이 아일랜드계라는 이유만으로 내 자신을 영국에 대항하는 혁명적 아일랜드인과 동일시하기도 했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국적과 상관없이 나는 늘 내 조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서 편안함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미국인이자 뉴요커로 받아들여지지만, 내게 미국이나 뉴욕은 멀게도 느껴진다.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순 없다.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대해 편안함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낀다. 이것이 내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코엔지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새로운 장소와 새로 만날 사람들에 대한 흥분과 소외감이 결합된 감정을 경험했다. 이는 당시에 내가 쓴 노래에 기록되어 있다. 음악은 앤디 버닉(Andy Bernick)이란 친구가 미국에서 보내준 것인데, 나는 여기에 멜로디와 가사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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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to be alone, and to share with strangers!
I made pancakes for mooses, only 3 came
Making nice with the inhabitants
Don’t know what you’re trying to tell me but I trust you
Or maybe I just don’t care
Life is always like this, never give in
Will the exiles ever get organized?
Always must enjoy
오 혼자 있으리, 그리고 낯선 자들과 함께하리!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을 위해 팬케이크를 만들었지만,
세 명밖에 오지 않았네.
이곳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들을 믿어.
아니라도 상관 없고.
인생은 늘 이런 것. 굴하지 말자.
추방 당한 이들이 공동체를 이룬 적이 있는가
언제나 즐겨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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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웃사이더들이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는 건 역설이자 비극이 아닐까? 끼리끼리 공동체를 구성할 수는 있지만, 다른 아웃사이더들과는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웃사이더의 종류가 너무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것이 항상 다른 사회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끊임 없이 느끼는 소외감은 아무런 논리가 없다. 나는 심지어 내가 무엇의 아웃사이더인지조차 모르겠는데,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안락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란 이중의 감정이 든다.
내가 도쿄에서 처음으로 초대 받은 두 번의 술 파티는, 동네 축제가 끝나고 열린 파티와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2주간 감옥 신세를 진 한 일본 청년이 풀려난 것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최소한 반 이상이 같은 멤버들이었다. 첫 번째 파티에는 좀 더 나이가 있는 이웃 주민들도 많이 참석한 반면, 두 번째 파티에는 코엔지 바깥에서 온 젊은 액티비스트들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나는 당시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도쿄 사회의 입장에서는 아웃사이더이지만, 우리 마을을 도쿄의 이웃, 즉 마을이 지리적으로 속해 있는 동네 속으로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흡수시켰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틀림없이 역설적인 존재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을 내에서 나라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마을 그 자체는 도쿄 사회에 동화되어 있는 동시에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중고품 가게 하나와 헌 옷 상점 하나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비슷한 가게가 더 늘어났고, 술집과 행사 공간도 하나씩 생겼다. 수요일 아침이면, 술집이 있는 바로 그 똑같은 공간에 라멘집이 문을 연다. 그리고 이 라멘집은 수요일 오후가 되면 “베지 캔틴(Veggie Canteen)”이라는 채식 식당으로 변신한다.
나와 내 친구들인 스와베(Suwabe)와 코지(Kojie)는 “12호”라는 곳에서 영화제를 운영한다. 스와베는 배우인데, 우리는 유튜브 초창기에 여러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그걸 찾아보면 우리가 당시에 여기서 곧잘 했던 것들이 나온다. 우리 친구 중엔 중고품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어서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스와베와 나는 토요일 밤마다 중고 가구점의 가구들을 벽쪽으로 밀어 놓고 영화를 상영했다. 그리고 이는 매주 다른 친구가 프로그램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동안 이렇게 하다가, 우리는 일반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의 촬영과 편집을 위한 기본적 도구를 보유한 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특히 이전에는 영화 제작이라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계획 중이었던 영화제를 위해 10분 이하의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고, 우리는 매번 20~30편의 영화를 접수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제작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일 년에 두 번씩 영화제를 열어야 할 판이다. (다음 영화제는 5월 말에 있고, 접수 마감은 5월 초이다. 출품을 원하면 이곳(mabashieigasai@gmail.com)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시길. 어떤 언어든 상관없다!) <호시야(Hoshiya)>란 작품은 내가 2년 전에 열린 2회 영화제를 위해 만든 것이다.
만약 이 마을에 비공식적 신조가 있다면, 그건 “무엇이든 재밌게!”일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돈을 버는 것에 이토록 무관심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에 이렇게 열심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곳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떤 국가 또는 문화든 그 역사나 사회학에 관해 학문적으로 일반화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마을의 비교적 새로운 인물인 유코 오쿠라(Yuko Okura)를 인터뷰하여, 그녀가 코엔지의 이 “동네”의 일원이 된 계기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독자들이 이 인터뷰를 통해 마을이 돌아가는 모습을 대략 엿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아마추어의 반란 12호”라는 행사 공간에 거주하면서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영화제가 열리는 바로 그 장소다. 예전에는 오후 만남의 장소로 모두들 애용했던 “아마추어 카페(Amateur Cafe)”라는 음식점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없어졌다. 술집이 아직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겐 모임을 위한 공간이 하나 더 필요했다. 그러다 우리는 2008년 초에 작은 방을 빌려 행사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고, “12호”란 이름을 붙였다. 나는 8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스태프 중 한 명이었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운영을 시작하지 못한 채, 첫 해를 보냈다. 일 년 전에 오쿠라가 거기로 이사해 들어왔고, 현재 그곳은 번창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솜씨 좋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에 특별히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코엔지에 머물 수 있었다. 브루클린에 있는 가족과 극소수의 친구들의 귀국 압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별달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 아마도 다음에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싶다. 평생 동안 깊이 아는 나라가 두 개밖에 안 된다는 건 슬픈 일인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을 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노래를 만드는 일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현재, 지금의 나는 코엔지에서 노래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을 활발히 하는 중이다.
나는 도쿄에 살고 있었지만 처음엔 코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에 내가 행사 공간
“아마추어의 반란 12호”에 왔을 때, 모두들 그 공간에 페인트칠을 하고 오픈 준비를 하느라 너무나도 들떠 있었다. “우린 여기서 뭐든 다 할 수 있어! 음악회도 열고 전시도 하고 영화 상영도 하고…”라고 말하면서. 난 코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12호는 정말 쿨해 보였다. 그래서 오픈 후에 나는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고, 행사든 뭐든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내가 갔을 때,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나베(일본식 찌개)를 먹으러 온 것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구상하면서 행사 같은 것에 대한 계획을 논의 중이었다. 나는 “일요일에 카페를 하고 싶어요.”라고 과감히 말을 꺼냈다. 그들은 “오케이, 오쿠라씨가 ‘일요
카페’라는 뭔가를 할 거고요.”라고 말하더니 바로 종이에 적어 버렸다! 그런 다음에야 내게 “근데 그게 뭐죠?”라고 물었다.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리 잘 알지도 못했지만, 나는 “이런 걸 하고 싶다.”고 말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것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이 주변은 정말이지 아무도 핏대를 세우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제발 그 카페를 해주세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저 분이 카페를 할 거고.”라며 이미 받아 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생각해 놓은 게 없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엔… 행사를 열고… 제가 차를 서빙하고요, 재봉틀이랑 실을 내놓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다 같이 뭔가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자 그들이 물었다. “그러면 그 행사는 며칠마다 열고 싶은가요?” 그래서 난 대답했다. “글쎄요, 한 달에 한 번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관계자가 되어 버렸다. 나는 행사든 뭐든 이런 종류의 무언가를 직접 한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을 정말로 신중하게 계획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그저 “그냥 해보는 게 어때요?”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내가 코엔지로 이사를 오기 한참 전의 일이다. 이곳은 재미있었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기는 한동안 여전히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일 년 가까이 그 일을 한 후에 시골로 돌아갈 뻔했었다.
나는 패션 스타일링을 공부하러 열여덟 살에 처음으로 도쿄에 와서, 파트타임 일을 하며 8년을 여기서 보냈다.
8년이 지나자, 마침내 나는 더 이상 내가 도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엄마와 친구들에게 고향으로 갈 거라고 말도 다 해놨다. 나는 무언가를 보러 가거나 다른 누군가가 한 무언가를 감상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 사진이나 전시회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도쿄에는 온갖 종류의 것들이 다 있다. 안 그런가? 그리고 시골에는 물론 그와 같은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든 생각은, 흥미로운 것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내 자신이 굳이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원래 나는 도쿄로 와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상상을 했었다.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인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말하자면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고 느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8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는 걸 즐겼고 많은 것들에 확실히 영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저걸 할 수 있어”라든가 “난 이걸 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꼭 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계속 추구할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골로 돌아가면 친구들도 있을 것이었다. 돌아가면 뭘 할지를 결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도쿄로 상경하는 것은 극단적인 체험이다. 나의 관심사는 옷이었기 때문에 특히 더 그랬다. 도쿄는 모든 것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 나는 또 그 정반대인 코엔지에 살고 있다.
일요 카페를 운영한 지 일 년가량 되었을 무렵, 나는 도쿄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내 월급은 항상 두 달 뒤에 나왔기 때문에 나는 한 달 정도 여유를 가지며 쉴 수 있었다. 당시에 12호는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스태프로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들이 원하는 일을 벌일 여건이 되지 않았다. 회의는 너무나도 많았지만 체계가 전혀 없었고, 평일에는 갈 때마다 언제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열흘 동안 그곳에 머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행사를 “호텔 오쿠라”라고 불렀다. 같은 이름의 거대 호텔 체인이 있는데, 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건 내가 묵을 나의 “호텔”이 될 예정이었고, 실제 호텔처럼 그 안에는 가게가 차려질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필요 없는 옷과 물건, 그리고 손으로 만든 물품들을 가져와서 판다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옷을 리폼하고,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하거나 직접 만든 물건을 판매할 수 있었다. 주얼리도 좋고 잡지도 좋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물품이나 초대할 사람을 고르지 않고 그저 백만 장의 전단지를 뿌렸다. 계획대로라면 난 옷을 만들고 있어야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나는 결국 내내 일만 하고 옷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음식을 만들고, 음료를 서빙하고, 해야 할 일을 기억하느라 잠시도 틈이 없었다. 그러다 피곤해지면, 나는 “이만 자러 갑니다!”라고 말했고, 더 있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그리하여 갑자기 그곳은 내가 열흘간 묵으려고 했던 애초의 그 호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진짜 호텔처럼 되어버렸다!
행사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12호에서 엄청나게 많은 맥주와 탄산음료가 팔려 나가는 것을 본 요요(Yoyo)는 이렇게 제안했다. “한 달 동안 머무는 건 어때? 그렇게 하면 우린 임대료를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제안을 따랐다. 온갖 유형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묻고는 머물면서 어울려 놀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재미있었고, 모두가 다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투숙 일정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요요도 한동안 머물렀는데, 우리는 함께 공중 목욕탕에 가곤 했다. 나는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돈 낭비일 뿐만 아니라, 나는 직장을 그만뒀기 때문에 어차피 더 이상 집세를 계속 낼 형편도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요요에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집에 있는 소파와 테이블과 의자를 여기 갖다 놓으면 말야, 좀 더 카페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내 침대도 소파로 쓸 수 있어! 내가 코엔지에 방을 구할 때까지 가구들을 여기 좀 두면 안 될까?” 그리하여 나는 내 CD와 책과 기타 등등 모든 것을 가져왔다. 그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물론 엄마는 “아직도 도쿄에 살고 있는 거니?”라고 했다. 나는 “코엔지에서 새 집을 구할 때까지 행사 공간에 머무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거기 괜찮아? 멀쩡한 아파트를 놔두고 그런 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니? 샤워실도 없는 데서 왜 살려고 해? 사람들이 행사를 보러 올 땐 어떻게 하려고?”라며 걱정했다. 고향 친구들은 “그래서 언제 올 건데?”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은 코엔지에 있어. 그냥 그게 다야. 내가 정말 바쁜 건지 아니면 시간이 남아 도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어.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시간이 전혀 없는 건지 아니면 나만의 시간이 지나치게 많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야. 어쨌든 몸은 정말 피곤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에 있었다.
“거기 못 살걸요!”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정말 그럴 예정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좋은 생각인데요!” 따위의 말만 했다. 그래서 나는 좀 있어 보면서 어찌 될지를 두고 보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사생활이 전혀 없었다. 이 지역에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온다. 그렇지 않은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행사가 있는 동안에는 괜찮지만,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사람들은 그저 머물러 있거나 “오쿠라씨 계신가요?”라고 묻고는 엉뚱한 시간에 들르곤 했다. 내가 실제로 이곳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사생활과 나만의 공간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나는 코엔지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전철도 타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각지에서 온 사람들, 또 때로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본 것이라든가 곧 있을 행사에 관해 내게 말해준다. 물론, 특히 도쿄 주변에서 열리는 행사에 관해서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온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듣게 될 뿐만 아니라, 다음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은 “와 멋진데요! 가봐야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주기도 했다.
나는 도쿄에서건 고향에서건 이와 같은 공동체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갤러리 같은 데서 일을 하면서 갤러리 관계자들을 만난다고 해도, 다 함께 연결되고 커가는 이러한 느낌은 겪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멋져요!”라고 말하며,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본다. 주방, 스피커, 프로젝터, 스크린, 테이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대여료가 비싸지 않다. 대여료는 행사 참석자가 10명만 되어도 대개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는 정치 행사, 영화 행사, 미술 전시회 등을 연다.
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이 현장에서 또 다른 행사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는 흔하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은 “있잖아요, 아이가 하나 있는데 어린 애를 데려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거의 없어요. 그리고 주로 난 집에 있는데,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요. 제가 행사를 주최해 볼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기가 있는 엄마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했고, 우리는 아기들에게 안전한 바닥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그 행사는 두 번 진행되었다.
나는 대부분의 저녁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주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그들을 위한 식사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서 인스턴트식품이나 패스트푸드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냥 동네 사람들도 어찌 알아내고는 내가 만든 밥을 먹기도 한다. 모두를 위해 요리하는 건 더 즐거운 일이다. 나는 음식의 모양과 색이라든가 “어제는 그걸 만들었으니 오늘은 이걸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저녁이 되면 모두의 전화로 식단을 전송한다. 요즘에는 내가 밥을 챙겨주고 있는 사람이 18명이나 된다.
다른 내 친구들은 이해를 잘 못한다. 그들은 그냥 내가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들에게 이게 왜 단지 나에서 그치는 일이 아닌지를, 즉 이런 일을 너무나도 흥미롭게 만드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주려 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터다. 공간에 들렀던 온갖 이상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에 관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 사람들이 내 집 앞에 나타나는 건 상상조차 안 돼.” 이건 내가 틀림없이 내게 딱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들은 “좀 불편하지 않니?”라든가 “너무 힘들 것 같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별로 그렇지 않다. 정규직보다 덜 힘든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그러고는 주말에 술을 마시거나 쇼핑을 하러 간다. 일요일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를 항상 궁금해 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똑같이 살았었고, “내가 정말 도쿄에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란 생각을 했었다는 거다.
부모님께 설명을 드리려 할 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행사를 위해 공간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걸 돕고 월간 일정을 세우는 일을 해요. 저녁에는 대가족처럼 다 같이 모여 앉아요. 그리고 난 이웃 사람들을 위해 300엔짜리 식사를 만들어 줘요. 다들 돈이 없거든요.” 그러면 엄마는 “그러면서 먹고 사는 게 가능하니?”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 엄마는 12호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여기 살기 전의 일이고, 코엔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고 예상치도 못했던 때였다. 당시에 나는 정치적 의식이란 게 별로 없었고, 그저 우연히 “윤타쿠 다카에(Yuntaku Takae)” 행사의 요리를 돕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오키나와 미군 기지와 관련해 다카에 마을의 헬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취지의 행사였다.
그곳에는 다카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온갖 것들이 전시되었다. 미군 헬리콥터 등의 사진이 있었고, 헬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이 연좌 시위를 벌이게 된 경위를 손으로 쓴 설명도 있었다. 단 하루 동안 진행된 행사였지만 사람들은 전시물의 폐기를 원치 않았고, 그리하여 12호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12호를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나도 종종 여기서 행사를 한다고 말했고, 엄마는 전시회를 찬찬히 둘러보더니 “도쿄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소가 참 많은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함께 차를 마셨다.
몇 달이 지난 후 내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엄마가 여기 온 적이 있다는 걸 사실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엄마에게 설명하면서, 내 친구가 매주 수요일에 채식 카페를 하는 그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재미있는 헌 옷 상점들이 있는데 그 근처라고만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12호라는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얼마 안 된 최근에 알게 된 일이었다. 엄마와 난 코엔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나 코엔지 가본 적 있어. 전쟁과 군사 기지에 대한 전시회가 있었던 그곳밖에 못 가봤지만.”이라고 말했다. “거기요? 내가 사는 데가 거기예요!” 그러자 엄마는 “거기? 건물 뒤쪽에 있는 그 어둡고 수상한 데 말이니? 살기 무섭지 않니?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 아냐?”라고 물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난 거기 사는 게 정말로 즐거워요.”라고 말하자 엄마는 “글쎄, 즐겁다니 됐구나.”라고 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12호와 같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가 아닌 것 같다. 그냥 나는 다양한 것들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 이걸 하게 됐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이사를 가면 12호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갈까 봐 걱정이 된다. “이 장소를 지속시키기 위해 내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갑자기 그만두고 싶다고 해도,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을뿐더러, 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연결을 이룰 순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 있고 누군가가 그냥 들렀을 때, 새로운 행사가 즉석에서 돌연 탄생한다. 그런 다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연결되고, 이 모든 것은 또 다시 연결을 이루고 쌓아 올려진다. 내가 찾는 어떤 특정한 행사나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약 내가 여기서 계속 일을 한다면 다양성을 훨씬 더 높이고 이곳을 한층 더 흥미로운 장소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기 때문에, 나는 당분간 여기에 남아 있고 싶다.
처음에는 중고품 가게 하나와 헌 옷 가게 하나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상점들이 갖춰져 있다. ‘http://trio4.nobody.jp/keita/shop/index.html’에 가면 지도가 있다. 모든 상점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 번호들은 말하자면 결코 “영구결번 되지” 않는다. 도쿄의 건물들은 종종 철거되고 재건축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열려 있는
상점 중 가장 낮은 번호가 붙어 있는 상점은 5호이며 재활용품 가게인데, 이는 중고 가구점인 14호와 연결되어 있다. 두 가게는 모두 마쓰모토씨가 운영한다. 마쓰모토씨는 <가난뱅이의 역습>의 저자이며, 시위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 공동체에게 있어서 시위는, 실제 마을로 치면 지역 축제와 같은 것이다. 시위가 있으면 모두가 모여서 축제를 벌인다. 사실 도쿄에서는 지역의 신사 축제에 동네 젊은이들의 참여율이 높은 것이 아주 보기 드문 상황인데, 우리 지역이 거기에 해당한다.
6호는 혼다씨가 운영하는 헌 옷 상점이다. 9호는 세피아(Sepia)라는 술집이다. 세피아의 2층에서는 인터넷 라디오가 방송된다. 또, 나와 친구들은 때때로 거기서 “아마추어 대학”이라는 걸 운영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친구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 예컨대 영어라든가 작곡, 무료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영화 편집 등을 서로서로 가르쳐 준다. 친구들과 나는 세피아에서 수많은 행사를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힙합 아카데미”였다. 한 친구가 디제잉을 하고, 나는 미국 힙합의 가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파워포인트로 스크린에 쐈다. 이 술집은 수요일이면 아침에는 백 퍼센트 천연 재료를 사용하는 라멘집으로 문을 열고, 오후 5시부터는 베지 캔틴으로 변신하는 그 장소이기도 하다.
10호(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2호였으나, 건물이 철거되고 재건축된 이후 번호가 바뀌었다)는
히카루 야마시타씨가 운영하는 헌 옷 상점이다. 그는 “트리오4 (Trio4, http://trio4.at.infoseek.co.jp/)”라는 퍼포먼스 집단의 단원이며, 아티스트 겸 퍼포머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가게에 들어온 헌 옷으로 자기 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데, 칼라에는 “중도포기 브랜드”라는 자체 브랜드명을 박아 넣는다.
하야토치리(Hayatochiri), 가터(Garter), 닌콤풉 커패서티(Nincompoop Capacity)는 13호에 같이 묶여 있다.
이 세 가게의 주인들은 모두 괴짜 패션으로 유명하다.
사실은 다른 상점들도 많다.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명칭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멀리는 교토나 독일에까지도 이 명칭에 번호를 매겨 사용한 사람들이 있다. 나와 내 친구 스와베와 코지에는 12호인 행사 공간에서 영화제를 운영한다.
글 / 제레미 할리(Jeremy Harley)
편집, 진행 / 구정연 (미디어버스 에디터)
번역 / 정은주